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
Unification under Oda and Toyotomi · 1560~1590년
- 언제
- 1560~1590년
- 어디서
- 일본 열도
- 누가
-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 무슨 사건
-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
연도가 특정된 연대
그때 자리에 있던 임금
- 몽골·투르크 초원 제국 투멘 자사그트 칸 (북원 대칸 12대 · 1558~1592)
- 미얀마 바인나웅 (미얀마(버마) 국왕 5대 · 1550~1581)
- 오스만 제국 쉴레이만 1세 (오스만 제국 술탄 10대 · 1520~1566)
- 이란(페르시아) 타흐마스프 1세 (사파비 왕조 2대 · 1524~1576)
- 인도 악바르 (무굴 제국 황제 3대 · 1556~1605)
- 일본 아시카가 요시테루 (무로마치(아시카가) 막부 쇼군 13대 · 1547~1565) / 오기마치 천황 (천황(天皇) 106대 · 1557~1586)
- 캄보디아 찬 리아치아ចន្ទរាជា (캄보디아 국왕 65대 · 1516~1566)재위 연대에 이견이 있습니다
같은 지역의 여러 나라를 함께 보였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의 임금만이 아닙니다. 나라별 왕조 연표 보기
이야기로 읽는 역사 — 통일한 다음에 보낸 편지
연표는 이렇게 적습니다. 16세기 중반 일본에 조총이 들어왔고, 오다 노부나가가 그 총을 쓰는 방법을 바꾸어 세력을 키웠으며, 그가 부하에게 살해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어받아 1590년 무렵 열도를 하나로 묶었다고요. 통일한 뒤 그는 농민에게서 무기를 거두고 땅을 조사해 장부로 만들었습니다. 조총이 들어온 경위는 이렇게 전합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일본에 닿은 해를 1542년으로 적은 책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총은 오래도록 「다네가시마」라고 불렸는데, 포르투갈 배가 처음 닿은 섬의 이름입니다. 그 뒤로 이즈미의 사카이와 기이의 네고로에서 총을 만들었습니다. 땅을 조사한 일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1583년에 검지사를 두어 전국의 지도를 만들게 했고, 되의 크기를 하나로 정했으며, 한 단의 넓이를 삼백육십 평에서 삼백 평으로 줄이면서 세금 부담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런데 열도가 하나로 묶였다는 사실을 이웃 나라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조선의 기록에 그 대목이 남아 있습니다.
『선조실록』에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당초에 우리 통신사 황윤길 등이 일본에 갔을 때, 풍신수길이 우리나라에 글을 보내어 군마를 정돈해 일본과 연합해서 곧장 명나라를 치자고 하였는데, 우리나라는 의리를 들어 거절하였다.
싸움을 끝낸 사람이 곧바로 다음 싸움을 준비하며 이웃에게 같이 가자고 한 것입니다. 통일이 안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한 문장이 보여 줍니다.
조선은 이 사실을 명나라에 두 차례 알렸습니다. 알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저들의 말이 거짓인지 사실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으나, 일이 명나라와 관계되므로 제때에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고요.
그러면서 조선은 자기 사정도 그대로 적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배 타는 데 서툴고 바다로 다니는 일을 익히지 않아서, 변방을 맡은 관리들은 오직 지키는 것만을 꾀하고 있을 뿐이라고요.
명나라는 다른 경로로도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에게 시암과 류큐 같은 나라들과 힘을 합쳐 일본을 치라고 했습니다. 뒤에 전쟁이 나자 명 황제는 요동의 군대 두 부대와 은 이만 냥을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읽을 때 하나 알아 둘 것이 있습니다. 이 기사는 전쟁 중에 쓰인 글이어서 상대를 아주 낮추어 부르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같은 사건도 누가 어느 자리에서 적었는지에 따라 부르는 이름부터 달라집니다.
생각해 보기 새 무기 자체보다 그것을 쓰는 방법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더 자세히 — 조사한다는 말 안에 든 것
색이 다른 대목은 자료에 적힌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전쟁이 시작된 그해 여름, 조선 조정이 명에 보낸 글이 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 전쟁 전에 무슨 제안을 받았는지가 적혀 있습니다.
당초에 우리 통신사 황윤길 등이 일본에 갔을 적에, 풍신수길이 우리나라에 글을 보내어 우리나라로 하여금 군마를 정돈하여 일본과 더불어 연합해서 곧장 명나라를 침범하자고 하였으나 우리나라는 의리를 들어 거절하였다는 것입니다.
같은 글에는 조선이 자기 형편을 어떻게 아뢰었는지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배 타는 데 서툴고 바다로 다니는 일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변방의 관리가 된 사람들은 오직 수비만을 도모하고 있을 뿐입니다.
명 예부는 속히 조선을 구원하여 울타리를 튼튼히 하라고 했고, 황제는 정병 두 부대와 은 이만 냥을 보내라 했습니다. 조선을 무엇으로 여겼는지가 「울타리」라는 한 낱말에 들어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일본을 왜노·소추라 부르고, 조선을 소방, 명을 상국이라 부릅니다. 그런 말을 골라 쓴 문서라는 점까지가 사료입니다.
그러면 건너온 쪽에서는 그동안 무엇이 달라져 있었을까요. 두 가지가 자료로 확인됩니다.
하나는 총입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일본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일본인에게 머스킷을 들여왔고, 그 무기는 오래도록 다네가시마라 불렸는데, 포르투갈 배가 처음 닿은 섬의 이름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화기 제조가 여러 곳에서 어느 정도씩 이루어졌고, 특히 이즈미의 사카이와 기이의 네고로가 그러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은 그 해를 1542년으로 적습니다. 오늘 널리 쓰이는 연대는 1543년입니다. 어느 쪽으로 단정하지 않고 그렇게 적은 책이 있다는 것까지만 말해 둡니다.
같은 대목에는 조심할 점도 붙어 있습니다. 당시 기록의 오즈쓰(大筒)를 대포로 읽으면 안 되고 구경이 큰 화승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의 대포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군대의 장비를 이루었다고 하기 어렵다고 적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땅입니다. 흔히 「검지」, 곧 토지 조사라고 한 마디로 부르는 일인데, 그 안에 실제로 무엇이 있었는지가 적혀 있습니다.
히데요시의 제도에서 모든 부피 측정은 용량이 정확히 고정된 상자로 이루어졌고, 모자라게 되는 것에 대한 허용은 이 퍼센트로 제한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단을 삼백육십 평으로 하던 규칙이 삼백 평으로 바뀌었습니다. 같은 해인 1583년에 토지 측량관이 임명되어 나라 전체의 지도를 만들게 했다고 합니다.
앞서 비슷한 일을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시카가 쇼군 요시테루가 1553년에 같은 조치를 취했으나, 그때 쓴 방법은 결코 이만큼 정확하거나 체계적이지 않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 결과도 함께 있습니다. 되를 통일하고, 단의 넓이는 줄이면서 부담은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온 나라의 토지에서 나오는 공식 세입이 팔백만 석 늘었다고 했습니다.
「땅을 조사했다」는 말 안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되를 하나로 맞춘 것, 한 단의 넓이를 줄인 것, 그리고 세금입니다.
확인하지 못한 것 도수령(刀狩)은 브링클리의 책에서 어떤 표현으로도 찾지 못했습니다. 나가시노 전투의 총 운용이 뒷날 각색되었다는 논쟁도 이 자료들 밖입니다. 1915년에 나온 통사라 저자의 판단은 쓰지 않고 조문과 연·월만 옮겼습니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1592) 6월 26일 8번째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국역·원문 대조) · F. Brinkley, *A History of the Japanese People*(1915), Project Gutenberg 전문
한눈에 보기
무슨 일이 있었나
조총을 활용한 전술과 잇단 정복으로 분열이 정리되었다.
왜 중요할까
이어진 도요토미의 대외 원정이 조선 침략으로 이어졌다.
핵심 키워드
- 통일
- 화약무기
같은 시기, 다른 나라에서는
1560~1590년 언저리연대가 겹치는 사건입니다. 같은 때에 일어났다는 뜻이지, 서로 원인과 결과라는 뜻은 아닙니다. 누르면 그 사건의 상세페이지로 갑니다.
그때 다른 나라의 임금
1560~1590년같은 해에 다른 나라에서 자리에 있던 사람입니다. 나라마다 한 사람씩만 실었습니다. 왕조가 여럿 겹치던 나라는 왕조 연표에 나머지가 있습니다.
- 중국 가정제1521~1567
- 한국 명종1545년~1567년
- 러시아 이반 4세1547~1584
- 신성로마제국 페르디난트 1세1556~1564
- 에스파냐 펠리페 2세1556~1598
- 영국 메리 1세1542~1567
- 포르투갈 세바스티앙1557~1578
- 프랑스 프랑수아 2세1559~1560
- 모로코 아브다라흐 알가리브1557~1574
-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의 메나스1559~1563
확인 문제
이 문제는 이 사건의 기록에 적힌 값으로 만든 것입니다. 답을 고르면 바로 알려 줍니다.
1.「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은 「강제동원 확대」보다 먼저 일어난 일이다.
2.「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은 언제 일어난 일일까요?
3.「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이 일어난 곳은 어디일까요?
4.「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5.「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은 어느 지역의 역사일까요?
참고자료
이 사건이 속한 시기와 주제를 다루는 자료입니다. 본문의 개별 문장을 어디에서 확인했는지는 아직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료가 둘이어도 교차 검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앞의 글자는 자료 등급으로, A는 당대 사료와 공식 문서, B는 학술 연구와 국가기관 해설, C는 백과사전과 개론 교재를 뜻합니다.
- CWorld History, Volume 1: to 1500 · OpenStax / Rice University · 2023 · CC BY-NC-SA 4.0링크
- CWorld History, Volume 2: from 1400 · OpenStax / Rice University · 2022 · CC BY-NC-SA 4.0링크
- A『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1592) 6월 26일 8번째 기사 — 「왜란이 일어나기 전 명나라가 우리 나라와 유구 등이 합쳐 일본을 치려던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국역·원문 · 1592년 기사 (실록 편찬은 그 뒤) · 공공누리 (한국고전번역원 국역)링크
- CA History of the Japanese People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End of the Meiji Era · Frank Brinkley (with Baron Kikuchi Dairoku) · 1915 · 공개(퍼블릭 도메인)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