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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선 전기KOR0083

4군 6진 개척

1433~1443년

언제
1433~1443년
어디서
압록강·두만강
어느 나라
조선
누가
황희, 하경복, 심도원
무슨 사건
4군 6진 개척

연도가 특정된 연대

그때 자리에 있던 임금

  • 조선 세종 (4 · 1418년~14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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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읽는 역사 — 땅이 적은 사람부터 뽑아라

자체 이중 확인 · 사람 검수 전
언제 1433~1443년어디서 압록강·두만강누가 황희, 하경복, 심도원

조선 초 북쪽 국경은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는 여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1433년 1월,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이 임금께 하직 인사를 하고 북쪽으로 떠납니다. 실록에 그날의 기사가 있습니다. 압록강 쪽을 맡은 사람입니다.

한 달 뒤,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나눈 이야기가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이 그곳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 대비하고 있더라고 보고하자, 임금이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마음 놓고 살림을 하게 만들어 뜻하지 않은 때에 칠 수 있겠는가.

황희가 다르게 말합니다. 속여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까 두렵다고요. 잡아간 사람과 가축을 돌려보내라고 먼저 꾸짖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때 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명분이 바르고 곧음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라고요.

그해 9월, 이조가 아룁니다. 이제 새로 설치한 자성군은 강계도 중익에 속한다고요. 군 하나가 새로 생긴 것입니다. 그해 12월에는 함길도로 떠나는 도체찰사에게 임금이 사목을 주어 보냅니다. 경원과 영북진을 옮겨 세우는 일을 어떻게 할지 조목으로 적은 문서입니다.

그 조목 가운데 하나는 이렇습니다. 각 고을 사람 가운데 전지의 경작 면적이 적은 자를 먼저 뽑아서 들어가 살게 하라. 곡식은 멀리 가져가기 어려우니 살던 고을에 바치고 경원이나 종성의 잡곡으로 받게 하라는 조목도 있습니다. 삼 년 뒤에는 평안도 각 고을의 향리 열다섯 집을 여연으로, 열 집을 자성으로 옮겼습니다.

이 일이 무엇으로 정리되었는지는 이백 년 뒤의 글에 나옵니다. 1654년 이지형이라는 관리가 올린 상소입니다. 우리 세종조에 이르러 김종서로 하여금 북쪽으로 물리쳐 두만강으로 경계를 삼으면서 여섯 진을 두었고 아울러 세 관을 설치하게 하니 변방 백성이 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상소의 그다음이 더 눈에 띕니다. 그 뒤로 나라 안에 일이 많아 북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관리들의 수탈로 사람들이 흩어졌으며, 전쟁을 겪은 뒤에는 천 리 국경이 반이나 묵은 땅이 되었다고 적습니다. 국경은 회의와 조목과 사람의 이동으로 만들어졌고, 지키지 않으면 그렇게 돌아갔습니다. 다만 이 기록들은 조선 조정이 쓴 것이라 맞은편 사람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 그대로 나옵니다.

생각해 보기 국경은 선을 긋는 것만으로 만들어질까요?

더 자세히 — 누구를 먼저 보냈나

색이 다른 대목은 자료에 적힌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이 기록들은 조선 조정이 쓴 것이라 맞은편 사람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 그대로 나옵니다. 그 말은 옮기지 않고 무엇을 의논했는지만 봅니다.

1433년 2월, 조정에 올라온 보고가 이렇습니다. 그들이 모두 어린애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우리나라에서 변을 일으킬 것에 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대도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임금이 물은 것은 방법이었습니다. 각각 그 생업에 안심하게 하여, 그 뜻하지 않을 때를 타서 공격할 것인가.

황희의 대답은 두 갈래였습니다. 먼저 셈을 합니다. 이익보다 손해가 많아서 노고만 있고 공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명분입니다. 죄를 선언하고 토벌하여 하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순하여, 곧음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임금은 때를 골랐습니다. 4월에 풀이 무성할 때를 당하여 군사를 내어 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말을 먹일 풀이 있어야 군사가 움직입니다.

군사를 얼마나 낼지에서는 의견이 갈렸고, 결론 대신 이런 말이 나옵니다. 멀리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간첩을 들여보내자는 말도 나왔지만 곧 막혔습니다. 언어와 의식이 같지 아니하여 보면 알기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이 일이 심히 위험하니 이를 정지하라고 했습니다.

이 논의가 있기 한 달 전에 압록강 쪽을 맡을 사람이 떠났습니다. 1433년 정월 19일 기사에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이 하직 인사를 올렸다고 적혀 있습니다. 뒷날 4군이 되는 곳입니다.

두만강 쪽을 맡은 김종서의 이름은 조금 다른 자리에 있습니다. 이백 년 뒤인 1654년, 호조 정랑 이지형이 올린 상소에 나옵니다. 우리 세종조에 이르러 김종서로 하여금 오랑캐를 북쪽으로 쫓아내어 두만강으로 경계를 삼으면서 육진을 두었으며 겸하여 3관을 설치하게 하니, 변민은 안정되고 국가는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세종대 당대의 기사가 아니라 이백 년 뒤 사람이 북방 대책을 주장하려고 돌아본 글입니다. 그 점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국경을 세우는 일에서 정작 어려운 대목은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그곳에 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1433년 12월, 함길도로 내려보낸 「경원·영북진 이설 사목」에 그 방법이 적혀 있습니다. 요해처에 목책을 만들고 부근 백성을 들어와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보낼지를 이렇게 정합니다.

각 고을 사람 가운데 경작 면적이 적은 자를 먼저 뽑아 들어가 살게 하라.

땅이 적은 사람부터 보낸 것입니다. 잃을 것이 적은 사람이 먼저 갔습니다.

같은 사목에는 사사로이 준비한 곡식은 살던 고을에 바치고 경원과 종성에 있는 잡곡으로 채워 준다는 조목도 있습니다. 짐을 지고 가는 대신 그곳에서 받게 한 것입니다.

새 고을을 만드는 기사도 남아 있습니다. 1433년 9월에는 이제 새로 설치한 자성군에 천호 두 명과 백호 네 명을 두게 해 달라는 이조의 아룀이 있습니다. 1436년 10월에는 평안남도 각 고을의 향리 열다섯 호를 여연에, 열 호를 자성에 옮겼다고 적혀 있습니다. 나라가 세는 단위는 사람이 아니라 호였습니다.

회령진의 첨절제사로 하한을 삼은 기사에는 고른 까닭이 한 줄로 붙어 있습니다. 그가 장수의 자손인 까닭에.

이백 년 뒤의 상소는 세운 이야기만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어서 이렇게 적습니다. 무오년 이후로 국내에 일이 많아 북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관계로, 여러 대에 걸친 금성 탕지를 탐관 포리의 손에 통째로 맡긴 결과 군사와 백성이 흩어졌는데도 괘념치 않았고, 병자호란 뒤에는 더더욱 형편없이 되어 천 리 봉강이 반이나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세운 이야기와 무너진 이야기가 한 문서 안에 이어져 있습니다.

확인하지 못한 것 4군과 6진 전체의 설치 순서와 완성 시점을 한자리에 적은 기사는 실록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낱낱의 기사만 있습니다. 4군을 뒤에 폐한 경위도 아직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월 19일·2월 28일, 세종 15년 9월 19일·12월 12일, 세종 16년 5월 27일, 세종 18년(1436) 10월 16일 · 『효종실록』 효종 5년(1654) 6월 4일 이지형의 상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눈에 보기

무슨 일이 있었나

북방에 4군과 6진을 설치해 국경 지배를 강화했다.

왜 중요할까

국경은 군사·이주·행정조직을 통해 형성된다.

핵심 키워드

  • 사군육진
  • 여진
  • 사민

같은 시기, 다른 나라에서는

1433~1443년 언저리

연대가 겹치는 사건입니다. 같은 때에 일어났다는 뜻이지, 서로 원인과 결과라는 뜻은 아닙니다. 누르면 그 사건의 상세페이지로 갑니다.

그때 다른 나라의 임금

1433~1443년

같은 해에 다른 나라에서 자리에 있던 사람입니다. 나라마다 한 사람씩만 실었습니다. 왕조가 여럿 겹치던 나라는 왕조 연표에 나머지가 있습니다.

  • 몽골·투르크 초원 제국 아자이 칸1425~1438
  • 오스만 제국 무라트 2세1421~1444
  • 이슬람권 샤루흐1405~1447
  • 인도 무바락 샤흐1421~1434
  • 일본 고하나조노 천황1428~1464
  • 중국 선덕제1425~1435
  • 캄보디아 폰히아 야트1421~1467
  • 러시아 바실리 2세1425~1433
  • 비잔티움 제국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1425~1448
  • 신성로마제국 지기스문트1433~1437
  • 영국 제임스 1세1406~1437
  • 포르투갈 주앙 1세1385~1433
  • 프랑스 샤를 7세1422~1461
  • 에티오피아 탁라 마르얌1430~1433
  • 아스테카 이츠코아틀1427~1440
  • 잉카 비라코차 잉카1400~1438

확인 문제

이 문제는 이 사건의 기록에 적힌 값으로 만든 것입니다. 답을 고르면 바로 알려 줍니다.

  1. 1.「4군 6진 개척」은 언제 일어난 일일까요?

  2. 2.「4군 6진 개척」은 「히즈라」보다 나중에 일어난 일이다.

  3. 3.「4군 6진 개척」이 일어난 곳은 어디일까요?

  4. 4.「4군 6진 개척」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5. 5.「4군 6진 개척」과 관련된 나라(정치체)는 어디일까요?

참고자료

이 사건이 속한 시기와 주제를 다루는 자료입니다. 본문의 개별 문장을 어디에서 확인했는지는 아직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료가 둘이어도 교차 검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앞의 글자는 자료 등급으로, A는 당대 사료와 공식 문서, B는 학술 연구와 국가기관 해설, C는 백과사전과 개론 교재를 뜻합니다.

  • B신편 한국사 52책 · 국사편찬위원회 · 1993~2002 · public web service링크
  • A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 current · public web service링크
  • C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 current · public web service링크
  • A『세종실록』 — 세종 15년(1433) 2월 28일 파저강 정벌을 논의한 기사와 세종 16년(1434) 5월 27일 회령진 첨절제사 임명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국역·원문 · 1433~1434년 기사 · 공공누리 (한국고전번역원·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링크
  • A『세종실록』 — 자성군 신설(1433), 경원·영북진 이설 사목(1433), 향리 사민(1436)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1433~1436 · 공공링크
  • A조선왕조실록 — 4군 6진: 최윤덕의 부임(1433)과 이지형의 회고 상소(1654)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 1433·1654 · 공개링크

이 항목은 한국사 학술자료기반 핵심연표에서 정리된 연표를 옮긴 것입니다. 위 참고자료와는 역할이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