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1907년 1~2월
- 언제
- 1907년 1~2월
- 어디서
- 대구
- 어느 나라
- 대한제국
- 누가
- 김광제, 서상돈, 양기탁
- 어느 기관
- 대한매일신보, 광문사
- 무슨 사건
- 국채보상운동
연도가 특정된 연대
그때 자리에 있던 임금
- 대한제국 고종 (1대 · 1897년~1907년)
- 대한제국 순종 (2대 · 1907년~1910년)
이야기로 읽는 역사 — 낸 사람들의 목록이 뜻밖이었다
1905년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에서 돈을 빌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을 적은 기록 하나는 나라가 진 빚이 천삼백만 원에 이르렀는데 갚을 기약이 없어, 사람들이 나라 땅이 저당 잡힐 것을 알면서도 손을 놓은 채 아무 방책이 없었다고 전합니다.
1907년 정월, 대구 사람 서상돈과 김광제 등이 담배를 끊자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계산이 붙어 있었습니다. 온 나라 이천만 명이 함께 담배를 끊고 한 사람이 한 달 담뱃값 이십 전씩 내면 석 달이면 원금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으는 방식도 적혀 있습니다. 위로는 만 원 천 원에서 아래로는 십 전 이십 전까지 받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고 얼마를 내라고 억지로 배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낸 사람은 신문에 실었는데 눈송이처럼 이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쓴 사람이 이어서 놀라운 말을 합니다. 낸 사람들을 보니 정부의 높은 관리와 서울의 사대부, 큰 장사꾼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요. 오히려 목이 터져라 외치며 서두른 쪽은 백성과 종과 품팔이, 빌어먹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적었습니다.
막으려는 쪽도 있었습니다. 일본이 대신 한 사람을 협박해 이를 금하게 하자 그가 이렇게 답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나를 오적의 우두머리로 부르니 몸 둘 곳이 없다, 다른 일은 금할 수 있어도 이 일만은 금할 수 없다.
돈이 어디로 갔는지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다만 그 기록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 것입니다. 1908년 7월 13일, 통감이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보가 남아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대한매일신보 기자 양기탁이 국채보상회 모금을 사적으로 썼다는 혐의가 있어, 경시총감이 12일 밤 할 말이 있다며 출두를 청해 경시청에 유치하고 조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영국 총영사가 풀어 달라고 하자 통감은 이렇게 답합니다. 이 사람은 죄인으로 체포된 것이 아니라 조사를 위해 출두하라고 해서 나온 것을 그대로 유치한 데 지나지 않는다.
앞의 기록을 쓴 사람은 끝을 미리 적어 두었습니다. 어떤 이가 이 일은 조만간 몇 사람의 배만 불리는 밑천이 될 것이라 했는데, 글쓴이는 한 줄을 덧붙입니다.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고요. 여성들의 참여도 신문 제목에 남았습니다. 1908년 7월 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금 중에 부인이 은채 패물로」라는 제목이 여러 날 실렸습니다. 은채는 은비녀입니다.
생각해 보기 나라의 빚을 국민이 갚겠다고 나선 데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을까요?
더 자세히 — 누가 냈고 누가 내지 않았나
색이 다른 대목은 자료에 적힌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이 운동의 셈법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기록에 그 계산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빚은 일천삼백만 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갚을 길이 없어 사람들은 나라의 땅이 저당 잡히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묶은 채 한 가지 대책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온 생각이 이것입니다.
온 나라 이천만 사람이 다 같이 담배를 끊고, 한 사람이 한 달에 쓰는 담뱃값으로 신화 이십 전씩을 거두면, 석 달을 채워 원래의 빚을 메울 수 있다.
이천만 곱하기 이십 전 곱하기 석 달입니다.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곱셈으로 나라의 빚을 갚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모금의 규칙도 적혀 있습니다. 위로는 만 원 천 원에서 아래로는 십 전 이십 전까지, 많고 적음을 가리지 말고, 억지로 할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
억지로 걷지 말라는 조건이 처음부터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낸 사람들의 이름을 신문에 실었는데, 그것이 눈송이처럼 잇달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가장 매서운 대목은 누가 냈는가가 아니라 누가 내지 않았는가입니다.
정부의 대관과 서울의 사대부, 그리고 부유한 상인과 큰 장사치 가운데 한 사람도 이에 응해 낸 자가 없었다.
한 사람도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집니다. 오히려 백성과 종과 품팔이와 걸인의 무리가 많았다.
낼 것이 많은 쪽에서는 아무도 내지 않았고, 낼 것이 없는 쪽에서 냈습니다.
임금이 했다는 말도 실려 있습니다. 신하와 백성이 이처럼 나라를 걱정하는데 내가 무슨 낯으로 뻔뻔히 있겠는가.
말리는 쪽의 말도 남아 있습니다. 한 대신은 다른 일은 금할 수 있어도 오직 이 일은 금할 수 없다고 했고, 일본 쪽 인사들도 의로운 거사인데 어찌 막겠는가라고 했습니다.
드러내 놓고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듬해 여름에 통감이 본국에 보낸 전보가 남아 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한글신문 기자 양기탁이라는 자는 국채보상회 모금을 사적으로 소비한 형적이 있다고 적고, 경시총감이 할 말이 있다 하여 출두를 청해 경시청에 유치하고 문초에 착수했다고 보고합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이 전보의 성격을 보여 줍니다. 영국 총영사가 그의 석방을 요구하자, 통감 쪽은 이렇게 답했다고 적었습니다.
이 양 씨는 죄인으로 체포된 것이 아니라 다만 조사를 위하여 출두를 명하고 이에 응해서 나온 것을 그대로 유치한 데 지나지 않는다.
붙잡은 것이 아니라 불렀더니 와서 그대로 두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이 문장이 자기 쪽 본국에 보내는 전보에 적혀 있습니다.
한편 사람들이 무엇을 내놓았는지는 신문 제목에 남아 있습니다. 1908년 여름에 열 번 넘게 되풀이 실린 제목이 있습니다.
국채보상금 중에 부인이 은비녀와 패물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은 담뱃값을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몸에 지니던 것을 내놓았습니다. 그 사실이 제목 하나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 기록을 남긴 사람은 마지막에 자기 예상을 적어 두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일이 시작은 있고 끝이 없으니, 이르든 늦든 몇 사람의 배를 채우는 밑천이 될 뿐이다.
그리고 그 옆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다만 이 기록은 개인의 글이라 논평과 소문이 섞여 있습니다. 무엇을 보았는지와 무엇을 판단했는지를 갈라서 읽어야 합니다.
확인하지 못한 것 여성 단체의 이름은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신문 제목의 첫 글자가 검색 결과로는 확인되지 않아 널리 알려진 이름으로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모금 총액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아직입니다.
황현 『매천야록』 권5 광무 11년(1907) 「단연회의 국채보상운동」,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통감부문서』 4권 往電 제116호(1908-07-13), 같은 DB ·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의 『대한매일신보』 기사 제목
한눈에 보기
무슨 일이 있었나
일본에서 빌린 국채를 국민 모금으로 갚자는 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졌다.
왜 중요할까
금연과 반지 헌납 등 여성과 서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핵심 키워드
- 국채보상운동
같은 시기, 다른 나라에서는
1907년 1~2월 언저리연대가 겹치는 사건입니다. 같은 때에 일어났다는 뜻이지, 서로 원인과 결과라는 뜻은 아닙니다. 누르면 그 사건의 상세페이지로 갑니다.
그때 다른 나라의 임금
1907년 1~2월같은 해에 다른 나라에서 자리에 있던 사람입니다. 나라마다 한 사람씩만 실었습니다. 왕조가 여럿 겹치던 나라는 왕조 연표에 나머지가 있습니다.
- 오스만 제국 압뒬하미트 2세1876~1909
- 이란(페르시아) 모자파르 앗딘 샤1896~1907
- 이슬람권 아바스 2세 힐미1892~1914
- 인도네시아 하멩쿠부워노 7세1877~1921
- 일본 메이지 천황1867~1912
- 중국 광서제1875~1908
- 태국 쭐랄롱꼰1868~1910
- 러시아 니콜라이 2세1894~1917
- 에스파냐 알폰소 13세1886~1931
- 영국 에드워드 7세1901~1910
-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1세1848~1916
- 포르투갈 카를루스 1세1889~1908
- 모로코 모로크코의 아브데라지즈1894~1908
- 아샨티 왕국 프렘페흐 1세1888~1931
- 에티오피아 메넬리크 2세1889~1913
- 통가 조지 투포우 2세1893~1918
확인 문제
이 문제는 이 사건의 기록에 적힌 값으로 만든 것입니다. 답을 고르면 바로 알려 줍니다.
1.「국채보상운동」은 언제 일어난 일일까요?
2.「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곳은 어디일까요?
3.「국채보상운동」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4.「국채보상운동」은 「송가이의 몰락」보다 먼저 일어난 일이다.
5.「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나라(정치체)는 어디일까요?
참고자료
이 사건이 속한 시기와 주제를 다루는 자료입니다. 본문의 개별 문장을 어디에서 확인했는지는 아직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료가 둘이어도 교차 검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앞의 글자는 자료 등급으로, A는 당대 사료와 공식 문서, B는 학술 연구와 국가기관 해설, C는 백과사전과 개론 교재를 뜻합니다.
- B신편 한국사 52책 · 국사편찬위원회 · 1993~2002 · public web service링크
- A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 current · public web service링크
- C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 current · public web service링크
- B황현, 『매천야록(梅泉野錄)』 권5 광무 11년(1907) 정미 「1. 斷煙會의 國債報償運動」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 1907년의 일을 적은 동시대 사록 · 공공누리링크
- A『통감부문서』 4권 往電 제116호(1908년 7월 13일) — 이토 통감이 하야시 외무대신에게, 양기탁 유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1908 · 열람링크
- A『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8년 7월 「國債報償금中에 婦人이 銀釵佩物로」 등 국채보상 관련 기사 제목 ·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nl.go.kr/newspaper) · 1907~1908 · 국립중앙도서관 제공링크
이 항목은 한국사 학술자료기반 핵심연표에서 정리된 연표를 옮긴 것입니다. 위 참고자료와는 역할이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