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건설
Construction of the Berlin Wall · 1961년
- 언제
- 1961년
- 어디서
- 베를린
- 어느 나라
- 동독
- 누가
- 발터 울브리히트, 빌리 슈토프, 에리히 밀케, 에리히 호네커
- 무슨 사건
- 베를린 장벽 건설
연도가 특정된 연대
그때 자리에 있던 임금
-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윈저(그 앞은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5대 · 1952~2022)
같은 지역의 여러 나라를 함께 보였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의 임금만이 아닙니다. 나라별 왕조 연표 보기
이야기로 읽는 역사 — 정식으로 정하기 전에 찍은 전단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은 둘로 나뉘었고, 베를린도 나뉘었습니다. 이 도시가 동독 한가운데에 있어서 동독 땅 안에 서베를린이 섬처럼 놓였습니다.
동독 사람들에게 이 도시는 통로였습니다. 서베를린의 마리엔펠데 수용소에 넘어온 사람들이 등록했는데, 1961년 8월 10일부터 사흘 동안 하루에 천오백 명에서 이천사백 명이 등록했습니다.
8월 11일 동독 의회에서 각료회의 부의장 빌리 슈토프가 말했습니다. 사람을 빼내 가고 꾀어 가는 일에 맞서 알맞은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요. 같은 날 저녁, 국가보안부 장관 밀케가 간부들에게 곧 있을 일을 알렸습니다. 작전에는 「장미」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튿날 오후, 동베를린의 인쇄소들은 아직 정식으로 의결되지도 않은 결정문을 전단으로 찍고 있었습니다. 그 시각 울브리히트는 팔십 킬로미터쯤 떨어진 별장으로 각료들을 「모임」에 불러 두었습니다.
8월 13일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도시 한복판에서 도로 포장이 뜯겨 나갔습니다. 뜯어낸 돌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콘크리트 말뚝을 박고, 철조망을 둘렀습니다. 그날 오후까지도 팔백 명이 서베를린에 닿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무장 병력 만 오천 명이 경계선에 서 있었습니다.
서쪽은 이 일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그날 아침 베를린에서 워싱턴으로 간 전보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늘어난 난민 흐름과 그에 따른 동독의 경제적 손실 때문에 동쪽이 기정사실을 만들기로 했다고요. 사흘 뒤 전보는 더 짧게 적었습니다. 늘어난 난민 흐름이 소련과 동독의 손을 밀어붙였다.
같은 시기 미국 정부 안의 회의 기록에는 이런 줄도 있습니다. 서방은 난민을 부추기지 않았다, 동독을 비워 버리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 이익은 난민이 동독을 떠나지 않는 쪽에 있다. 벽을 세운 쪽만 사람이 나가는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벽에서 몇 사람이 죽었는지는 오랫동안 답이 갈렸습니다. 포츠담의 연구소와 베를린장벽재단이 오백일흔여섯 건을 조사해 백마흔 명의 이름과 사연을 정리했고, 국경검문소에서 죽은 여행자 이백쉰한 명은 따로 세었습니다. 그 조사는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벽 때문에 삶이 무너져 죽은 사람들의 수는 이 안에 들어 있지 않다.
생각해 보기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막으려고 벽을 세우면 무엇이 드러날까요?
더 자세히 — 막고 싶었던 쪽이 하나가 아니었다
색이 다른 대목은 자료에 적힌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 며칠 사이에 사람이 얼마나 빠져나갔는지는 서베를린 수용소의 등록 인원으로 남아 있습니다. 8월 10일에서 11일 사이 천칠백 명 남짓, 다음 날 천오백 명 남짓, 그리고 12일에서 13일 사이에는 약 이천사백 명이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늘었습니다.
동독 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시간 단위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8월 11일 인민의회에서 각료회의의 뜻이 밝혀졌고, 그날 저녁 여섯 시에 작전명이 전달되었습니다. 12일 오후에는 각료회의의 정식 의결이 있기 전에 이미 결정문을 전단으로 찍고 있었습니다.
같은 날 지도부는 베를린에서 팔십 킬로미터쯤 떨어진 호숫가로 각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저녁에 봉쇄 명령이 전달되었습니다.
13일 이른 아침에 포장이 뜯기고 콘크리트 말뚝이 박히고 철조망이 놓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연표는 그날에도 팔백 명이 서베를린에 닿았다고 적습니다. 첫날에는 아직 빈틈이 있었습니다.
에버트가에서는 사람들이 펜치로 철망을 끊고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뒤에 남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는 병력이 배치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서방 정부 안에서 오간 문서를 읽으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8월 13일 베를린에서 보낸 전보는 원인을 이렇게 적습니다. 난민 유출이 늘어나면서 동독에는 경제적 손실이, 사회주의 진영에는 위신의 손상이 따랐고, 그 결과 동쪽은 최근 바르샤바조약국 모스크바 회의에서 기정사실을 만들어 나가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사흘 뒤의 전보는 더 분명합니다. 난민 유출 증가가 소련과 동독의 손을 강제했고, 직접적인 물리력에 의한 행동이 기정사실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상대편에 대한 분석입니다. 그런데 미국 정부 안의 회의 메모에는 자기 쪽 입장이 적혀 있습니다.
서방은 난민을 부추기지 않았다. 서방은 동독을 탈독일화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익은 동독 사람들이 떠나지 않는 데 있다.
또 다른 문서는 더 나아갑니다. 베를린 문제를 소련과 합의하려면 난민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결국 동독이 난민의 서베를린 도달을 막는다는 것을 사실상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사람이 빠져나가는 것을 문제로 여긴 쪽이 한쪽만은 아니었습니다. 한쪽은 벽을 세웠고, 다른 쪽은 그 벽을 사실상 받아들이는 것을 협상의 조건으로 검토했습니다.
이 벽에서 몇 사람이 죽었는지는 지금도 하나의 수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조사 기관마다 일흔여덟, 여든여섯, 아흔둘, 백스물둘, 이백 이상으로 갈렸습니다.
두 연구기관이 오백일흔여섯 건을 조사해 백마흔 명으로 정리했고, 국경검문소에서 죽은 여행자 이백오십한 명은 따로 셌습니다.
그리고 그 조사 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장벽이 삶에 미친 영향 때문에 슬픔과 절망 속에 죽은 사람들의 수는 이 안에 들어 있지 않다.
셀 수 있는 것과 셀 수 없는 것을 갈라 적어 둔 것입니다.
확인하지 못한 것 떠난 사람들이 젊고 기술을 가진 쪽에 치우쳤다는 서술은 아직 근거를 대지 못했습니다. FRUS 이 권의 해당 문서들에는 난민의 나이와 직업을 적은 대목이 없습니다.
Chronik der Mauer(연방정치교육원·도이칠란트라디오·포츠담 현대사연구소)의 1961년 8월 연표와 사망자 조사 페이지 ·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1–1963*, 제14권 「Berlin Crisis」, 미 국무부 역사관실
한눈에 보기
무슨 일이 있었나
동독이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는 길을 막는 장벽을 세웠다.
왜 중요할까
냉전의 경계가 도시 한가운데를 지나는 형태로 드러났다.
핵심 키워드
- 베를린 장벽
- 냉전
같은 시기, 다른 나라에서는
1961년 언저리연대가 겹치는 사건입니다. 같은 때에 일어났다는 뜻이지, 서로 원인과 결과라는 뜻은 아닙니다. 누르면 그 사건의 상세페이지로 갑니다.
그때 다른 나라의 임금
1961년같은 해에 다른 나라에서 자리에 있던 사람입니다. 나라마다 한 사람씩만 실었습니다. 왕조가 여럿 겹치던 나라는 왕조 연표에 나머지가 있습니다.
- 이란(페르시아)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1941~1979
- 일본 쇼와 천황(히로히토)1926~1989
- 태국 푸미폰 아둔야뎃1946~2016
- 베냉 왕국 아켄주아 2세1933~1978
- 아샨티 왕국 프렘페흐 2세1931~1970
- 에티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 1세1930~1974
- 통가 살로테 투포우 3세1918~1965
확인 문제
이 문제는 이 사건의 기록에 적힌 값으로 만든 것입니다. 답을 고르면 바로 알려 줍니다.
1.「베를린 장벽 건설」은 언제 일어난 일일까요?
2.「베를린 장벽 건설」이 일어난 곳은 어디일까요?
3.「베를린 장벽 건설」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4.「베를린 장벽 건설」과 관련된 나라(정치체)는 어디일까요?
5.「베를린 장벽 건설」은 「한국병합」보다 먼저 일어난 일이다.
참고자료
이 사건이 속한 시기와 주제를 다루는 자료입니다. 본문의 개별 문장을 어디에서 확인했는지는 아직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료가 둘이어도 교차 검증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앞의 글자는 자료 등급으로, A는 당대 사료와 공식 문서, B는 학술 연구와 국가기관 해설, C는 백과사전과 개론 교재를 뜻합니다.
- CWorld History, Volume 2: from 1400 · OpenStax / Rice University · 2022 · CC BY-NC-SA 4.0링크
- CWorld History Since 1500: An Open and Free Textbook · East Tennessee State University · 2022 · CC BY 4.0; images separate링크
- BChronik der Mauer — 1961년 8월 연표 (8월 10~14일) · 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 Deutschlandradio · Zentrum für Zeithistorische Forschung Potsdam · 1961 · chronik-der-mauer.de 이용 조건링크
- AChronik der Mauer — 베를린 장벽 사망자 조사(Todesopfer) · Gedenkstätte Berliner Mauer · Zentrum für Zeithistorische Forschung Potsdam (Hertle/Nooke 편, 『Die Todesopfer an der Berliner Mauer 1961–1989』) · 2017년 8월 9일 기준 · chronik-der-mauer.de 이용 조건링크
- C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1–1963, Volume XIV: Berlin Crisis, 1961–1962 · U.S. Department of State, Office of the Historian · 1993 · 공개링크